이육사 시신 수습한 故 이병희 애국지사의 명복을 빕니다"
현재 정부에 의해 항일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은 사람은 1만2200여명(남성 1만2000명, 여성 200여명)이다.
이병희 애국지사 할아버지 이원식 독립지사는 동창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이끈 독립 1세대이다. 1925년 9월 부친 이경식 애국지사는 대구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암살단 단원으로 활약했다. 아버지 이경식 선생이 죽음을 맞이으면서 딸(병희)에게 유언을 통해 “너는 끝까지 나라를 지켜라, 깨끗이 살다가 죽어라”고 했다고. 이병희 애국지사도 생전에 아들에게 “독립정신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라. 나라가 망했을 때는 모두 달려들어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뿐, 내가 한 일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애국지사는 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열여섯 살에 경성 ‘종연방적’에 입사해 500명의 근로자를 모아 항일운동을 주도하다 잡혀 4년 반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0년 북경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군 비밀문서 연락책을 담당했다. 1943년 북경으로 온 이육사와 독립운동을 협의하던 중 그해 9월 일경에 잡혀 북경감옥에 구금됐고, 이어 잠시 국내로 잠입, 이육사와 잡혀 함께 옥살이를 했다. 그는 1944년 1월 11일 석방됐고 함께 투옥됐던 이육사는 닷새 뒤인 1월 16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이 애국지사에게 경성감옥 간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조국 독립을 위해 열일곱 번이나 투옥한 저항시인 이육사 선생과 함께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이병희(95) 애국지사. 경성감옥에서 옥사한 이육사 선생의 시신을 직접 거둔 장본인이다. 현재 그는 경기 부평 사랑마루 요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이육사 시인과 함께 옥살이를 한 이병희 애국지사는 지난 1944년 1월 11일 석방됐고 바로 며칠 뒤인 1월 16일 이육사 시인이 순국을 하게 돼 유품과 시체를 수습한 사람이다. 최근 이병희 애국지사는 이윤옥 시인과의 만남에서 마흔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이육사 시인의 죽음과 관련한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났다.”
이병희 애국지사는 “그날 형무소 간수로부터 육사가 죽었다고 연락이 왔어, 저녁 5시가 되어 달려갔더니 코에서 거품과 피가 나오는 거야. 아무래도 고문으로 죽은 것 같아. 내가 출옥할 때만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라고 회고했다고 < 서간도에 들꽃 피다> 시집 저자인 이윤옥 시인은 밝히고 있다.
지난 2012년 8월 2일 별세한 고 이병희 애국지사의 빈소는 서울 중앙보훈병원 영안실 11호실에 차려졌다. 생전 그에 대한 헌시를 <서간도 들꽃 피다> 시집에 남긴 이윤옥 시인과 김영조 한국문화사랑협회장이 지난 3일 장례식장을 찾았다. 이들에 의하면 “사람이 거의 없었고, 가족들만 조용히 고인의 넋을 기리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운 한 여성독립운동가의 최후가 너무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는 국가독립유공자법에 따라 지난 4일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했다.
다음은 작년 7월 초 이윤옥 시인이 투병생활을 하고 있던 한 요양원을 찾아 이병희 애국지사에 받친 헌시 ‘이육사 시신을 거두며 맹세한 독립의 불꽃(이병희)’이란 '시'이다.
"경성감옥 담쟁이 서로 손잡고 올라가는 여름
요즘 아이들 밀랍인형 고문실에 멈춰서 재잘대지만
차디찬 시멘트 날바닥 거쳐 간 독립투사 그 얼마더냐
지금은 공부보다 나라 위해 일을 하라
아버지 말씀 따라 일본인 방적공장 들어가서
오백 명 종업원 일깨운 항일투쟁의 길
감옥을 안방처럼 드나들 때
고춧가루 코에 넣고
전기로 지져대어 살 태우던 천형(天刑)의 세월
잡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만 죽어라
동지를 팔아먹지 마라 결코 팔아먹지 마라
혼절 속에 들려오던 아버님 말씀 새기던 나날
광야의 육사도 그렇게 외롭게 죽어 갔으리
뼈 삭는 아픔 숯 검댕이 영혼 부여잡으면서도
그러나 결코 비굴치 않았으리라
먼데 불빛처럼 들려오는 첫 닭 우는 소리를
어찌 육사 혼자 들었으랴"
언론에서...발취